[역량강화개인결과물] 류현정 - 가장 앞에 선 우리의 힘

작성자: ryuvnr - 2021.02.10

가장 앞에 선 우리의 힘

류현정

 

지난 7일간 ‘역량강화 프로그램’에 임하며 바쁘게 배웠다. 전문가분들의 강연을 들으며 그간 충분히 알지 못했던 에너지 분야에 관해 새롭게 알아갈 수 있었고, 우리나라 밖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도 있었다. 동료 단원분들과 여러 질문과 과제에 부지런히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다시금 깨달음을 얻곤 했다. 그래서 역량강화 프로그램이 끝나고 무언가 성장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렴풋한 마음이 쉽게 흐려지지 않도록 글로 남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역량’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저 멀리 런던에서, 베를린에서, 통역사분의 도움까지 받아,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힘은 어떤 힘이며, 어디에 쓰일 힘일까? 힘을 길러야 한다면, 이미 갖고 있는 힘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일까?

나는 내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가 어색해지지 않게 된 현재의 환경 문제 상황에 쉽게 분노했다. 느긋해 보이는 환경부의 조치에 열을 올렸고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에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실망할 준비를 했다. 환상과도 같던 해외 성공 사례에 경탄을 표하다 환경 관련 강연을 들으며 불안에 속도를 붙였다. 이만큼의 감정은 분명 어떤 종류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힘을 갖고 나아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돌아오는 질문은 왜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심 갖고 있지 않은지에 관한 어리숙한 불만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내가 신뢰하던 힘은 너무나 쉽게 사그라들곤 했다.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달리기만 하던 분노는 길을 잃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힘의 속성마저 잃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종종 화내고 불신하며 ‘친환경’ 마크가 붙은 것들을 사들이는 것뿐일까 의심스러웠다. 소위 ‘그린 컨슈머’로서 대기업의 비건 제품 출시를 응원하고 그러한 물건을 선택했으나, 그보다 기후 위기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에너지 부분에 관해서는 내게 익숙해져 버린 소비자의 정체성을 발휘할 틈이 없어 한없이 무력해지곤 했다.

7일 동안 전문가분들로부터, 동료 단원분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 것은, 내가 믿고 있던 힘은 그로서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한 힘은 쉽게 동요될 수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타격하지 못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힘에 감정적 동요를 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2050년이 아닌, 당장의 10년 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우리에게 한 종류의 동력이 될 수 있다. 냉랭한 이들의 무관심을 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후 위기에 맞서 싸울 줄 알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강연자분들은 강연 도입부에 준비하신 기후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하는 슬라이드를 자주 생략하곤 하셨다. 우리가 비상 상황에 있음은 이미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이미 익숙한 것에 관해 불안해할 여력을 내어 주시지 않았다. 대신, 비상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힘을 쏟으셨다. 이는 비상 상태에서 벗어날 해결방안으로 향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강연자분들의 이야기에는 방향이 있었다. 그건 내가 나름 환경 문제에 관심을 오래 가져왔기에 쌓였으리라 기대했던, 힘이라 부르고 싶었던 것에는 없었던, 그러나 힘이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바로 9년 후를 종착지로 삼아 새로운 논의들을 성실히 반영해 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불쌍한 북극곰에 관해 오래 들어온 만큼, 나의 힘과 비슷했던 동요는 나이를 먹었지만 그만큼 낡기도 했음을 깨달았다. 처음 재생에너지에 관한 내용을 들었을 때, 그는 비싸다고 하기에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과학자들의 연구와 개발은 나의 어린 시절에 정체해 있지 않아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고, 태양광은 심지어 가장 저렴하다는 수식까지 붙었다. 지금의 문제는 가격이 아니었다. 도리어 정의와 합의의 문제였다. 또한, 광활한 들판은 언제나 환경친화적이지 않았다. 종종 그 공간에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가 들어서는 게 모두의 생존을 위해 현명한 선택인 경우도 있었다.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해외의 사례는 완벽히 이상적이지 못했다. 기후 위기 대응에 관하여 선진적이라 믿어온 유럽연합의 감축 목표마저 파리 협약의 1.5도 목표를 충족하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을 때 절망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으나, 그들이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이 가진 구조와 자원을 꼼꼼히 활용하며 바뀌고 있음을 확인하며, 우리도 우리의 것들을 살펴 바꿀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셈하게 되었다.

 

막연함이 한 겹씩 걷히자, 희망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간 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하나씩 발견했을 때, 그 가짓수가 무한히 많게 느껴져 막막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곧 ‘기회의 땅’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향할지 이제 알 듯하니, 그쪽으로 한 발자국을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도달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희망을 내어주신 분들 역시 불가능의 영역이라 규정해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가령 채식 식습관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요원하게 보셨고, 종종 핵심적인 지점에 다다라 ‘이해관계’를 언급하시며 얼버무리곤 하셨다. 이러한 모습은 나를 조금 실망스럽게 했다. 그리고 다짐하게 했다. 7일 동안 길러온 힘은 물론 연사님들에게서 전수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7일 밖에서도 우리의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프런티어’로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한 번 더 나아간, 가장 앞의 것이라고.

 

지난 학기 수업 시간에 읽고,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무척 좋아하게 된 짧은 글이 하나 있다.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라는 글이다. 보르헤르트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별마저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별은 너무나 많고, 그래서 우리가 그 이별들을 하나하나 음미한다면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둑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기는 세대, 고향이라고 할만한 돌아갈 곳이 없는 세대,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줄 만한 사람이 없는 세대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에게 놓인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재빠를 것을, 그러나 또 공평할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것들 위에서 살아가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할 것을 지시한다.

보르헤르트의 글을 좋아하는 것은 단지 그가 지금 우리의 불안을 세심히 포착한 것에 있지 않다. 그는 ‘그러나 우리는 미래가 있는 세대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 그러나 우리는 모든 미래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문장은 그의 강력함만큼 온전히 희망적으로 해석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는 미래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책임질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에 집중하고 싶다. 모든 미래가 우리의 것이기에 우리는 새 미래를 어떻게 그릴지 결정할 수 있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삶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우리’에 우리 아니었던 동식물과 환경을 포함해 볼 수도 있다. 속도와 정의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이전의 실패, 현재의 성공을 바탕으로 더 넓은 성공을 그려낼 수도 있다.

 

희망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첫 발자국을 뗀다.